과도기-로마와 중세의 연극 Transition - Roman and Medieval Drama
중세연극 Medieval Drama
로마제국의 힘은 유목 야만인의 침입(A.D.6세기)에 의해서 약화되었고, 기독교 교회의 영향은 로마의 권력을 분쇄하였고 대중적인 오락과 연극활동을 약화시켰다. 대중연극은 6세기부터 10세기에 이르는 이른바 암흑시대라고 불리는 중세시대에는 금지되어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교회는 사제와 성가대 사이에 tropes, 혹은 찬송의 형식으로 대화를 교환하는 것을 미사에 소개함으로써 극장예술을 부활시켰다. 후에 실제의 장치와 의상이 교육받지 못하고 연극에 쉽게 영향을 받는 일반사람들의 도덕적·종교적 교육을 효율화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한 활동이 보다 세속화되고 더 많은 참가자들을 갖게 되자 연극은 교화 자체로부터 교회의 계단이나 거리, 마당으로 나오게 되었다. 신비극(성경이야기), 기적극(성자와 순교자의 이야기), 도덕극(도덕적 교훈이 있는 이야기)들이 간단한 단상 위에서 행해졋다. 영국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연극이 말이 끄는 수레무대 위에서 공연되었는데 거리마다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멈춰서 공연을 하는 것이었다. 무역상들은 영국과 유럽대륙에서 이러한 종교적인 연극을 후원하고 제작하는 조합을 조직하였다.
결국, 세속적이고 비종교적인 연극들이 종교적 연극들이 종교적 연극보다 더욱더 중요하게 되었다. 토속해학극은 연극활동의 주가 되었고 종교극으로부터 위대한 르네상스 연극으로 발전시키는 과도기의 중요한 발전이었다. 다른 과도기적 연극 형태인 막간극도 공연되었는데 그것은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에 의해서 주로 향유되었다. 막간극은 노래와 춤과 이야기에 능통한 음유시인에 의해서 자주 공연되었다. 중세의 연극은 유명한 극작가를 낳지는 못했다. 작가는 일반적으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제리 L. 크로포드 / 조안 스나이더, <연기 - 개발과 표현>, 도서출판 예하, 1988
◎(六) 중세 세속극의 제양상
재래적인 지방적, 토속적인 연희로서, 생사와 부활을 상징하는 놀이로서의 인형놀이나, 가면무도, 검극 등이 교회의식과는 상관없이 유럽각국에 전파되어, 이들이 나중에는 교회의 양식을 가장하고 공공연히 교회에 까지 나타나 로마제나 도화제 등의 의식으로 그들의 교회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로서 세속적인 희극정신을 들어내어 왔다는 것들은 이미 전술한 바로서 알 수가 있다.
중세희극을 발전시킨 또 몇가지의 원인은 12·3세기 이후 15세개까지의 많은 기적극과 성사극들이 이미 그 무대를 달리 하면서부터 많은 희극적 요소들을 흡수해 갔다는 사실과 중세의 학생들이 라틴어의 이해와 연구를 위해 로마의 프라우터스 등의 희극을 읽고, 또 상연했었다는 사실들을 들 수가 있으니, 이러한 사실들이야 말로 중세희극의 발생에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세의 희극이 그 체제를 갖추어 가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경 프랑스의 음유시인 아담·데·라·하르(Adam de la Hale)이후 부터였으니 그는 아라스市에서 나서 어느 증원의 서기로 있다고, 종교계에서 입신 출세하려는 초지를 버리고, 마리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그후 프랑스 희극(소극)의 최고작인 「로방과 마리온(Jeu de Robin et Marion)」, 「녹음 아래서의 연극(Jeu de la Feuillee)」의 2편을 남기고, 13세기 말에는 북부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회적, 변란에 직접 관계하기도 했으나 만년에는 프랑스를 떠나 나프리의 사르르 궁연에서 종사하다 죽었다.
그의 「로빙과 마리온」극은 1283-5년 사이에 나포리의 샤르르·당쥬(Charles d'Anjou)궁연에서 초연된 가극으로서 한쌍의 A동과 A녀의 연애에 질투를 품고 덤빈 기사의 이야기를 전원적으로 그린 서정시극인데, 여기에는 또 26편의 가요가 곁들여 있어 희가극의 효시이기도 한 작품이다.
「녹음(綠陰) 아래서의 연극」은 1262년 5월 1일에 그의 출생지인 아라스에서 초연된 것으로서, 별 내용은 아니지만, 당시으 사회에 가혹한 풍자와 시적인 판타지가 혼합된 작품이다. 18명의 작중인물 가운데 특히 <여론>과 <바보>라는 만의적인 인물을 등장시킨 것은 중세 희극의 특징으로서 이 작품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중세희극의 전성기는 성사극의 그것과 거의 일치되는 14세기 말에서 15세기까지 였으니, 이때의 각국 도시에는 성사극을 상연하는 단체가 조직되어 있었고, 특히 파리에는 법률관계의 인사들이 모여 〈법조극단〉을 만들어 풍속적인 교훈극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으며, 그 밖에도 각 도시에는 그 A적인 단체로서 여러개의 단체가 결성되어 희극을 제작상연하고 있었다.
이 〈법조극단〉(Basoche)은 원래의 이름은 <끄레르 ·데·라·바소슈>(Les Clercs de la Basoche)로서, 법조회란 말인 <바소슈>와 법원의 서기란 말의 <끄레르>의 합성어였으며, 당시 법원의 하급A원 극단을 만들고 코퀴야르(Guillaume Coquillart, 1450-1510)의 작품인 「우직한 여인과 A한 여인을 위한 구두변론」(Plaidoye dentre la Simple dt la Rusee, 1477)과 앙리·보데(Henri Baude, 1420-95)등의 풍자적 교훈극을 상연하며, 그들이 알상 겪는 소송사건을 주제로 하여 재판 및 정부의 A를 풍자하고, 조소하던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는 그것의 A단체인 <앙팡·산·수시>(Enfants sans-souci)란 희극단체와 함께 많은 소극과 교훈극도 연출했다. 그 중에서도 당시의 소송관계를 취급한 <빠뜨랑 선생>(La Farce de Maitre Patelin)은 최고의 걸작으로서, 작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1599해으로 된 산문 소극(Farce)이며, 제작 및 상연연대는 루이 11세 치하의 1464년 겨울이었다.
내용은 소송의뢰인을 전연 갖지 못하는 변호사 <빠뜨랑>이 자기와 아내의 옷이 탐나자 A점에 들어가 값진 복지 두벌을 외상으로 갖고 가면서, 값은 자기 집에 와서 받아가되, 그때 함께 한잔하자고 한다.
이런 감언에 솔깃해진 주인은 곧 그의 집으로 갔으나, 빠뜨랑은 침대에서 헛소리를 하며 앓아 누웠고, 그의 아내는 그의 옆에서 울고 있었다.
ㅁ점 주인은 놀란 나머지 가슴에 십자가를 긋고는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에 자기 몰래 양을 잡아먹은 양치기 아뉴렛뜨를 만나자, 양복 값으로 화가 난 주인은 당장 아뉴렛뜨를 해고해 버린다. 그러나 아뉴렛뜨는 빠뜨랑 변호사에게로 가 자기의 사건을 의뢰하고 이에 대해 언제나 이런 사건만 맡고 있던 빠뜨랑은 그에게 재판관의 앞에 나가거든 그저 바보처럼 "음메!"소리만 하라고 한다. 드디어 재판일이 되어 재판정에 나온 A점의 주인은 양의 이야기를 하다 빠뜨랑을 발견하고 다시 복지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러자 자초지종을 알 수 없게 된 재판관은 다시 양치기인 아뉴렛뜨에게 이야기를 시키지만, 그는 또 "음메!" 소리만 하므로, 원래부터 바보라고 생각하여 그를 방면시켜 버리고 퇴정한다. 빠뜨랑이 아뉴렛뜨에게 약속한 보수를 요구하자, 아뉴렛뜨는 역시 "음메!" 소리만 늘어놓으므로 빠뜨랑도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속았다고 투덜대고 돌아간다.
이는 곧 모두가 자기의 속임수에 자기가 걸려들던 당시의 사회상을 풍자한 전형적인 소극으로서, 등장인물 하나 하나의 성격들이 치밀하게 묘사된 기지에 찬 작품이며, 프랑스에서는 몰리에르(Moliere, 1622-1673)이전의 유일한 걸작이었다.
이밖에 앙팡·산·수시의 회원이던 그랑고르(Pierre Gringore,1475-1538)가 쓴 「우자의 왕(愚者의 王)」(Le Jeu du Prince des Sots)은 소극, 교훈극 및 바보극의 3부작 희곡으로서, 파리에서 1511년에 사육제의 끝날이 2월 24일에 초연되었던 것이며, 이는 루이 12세(Louis ?, 재위 1498-1515)를 변호하고 로마교화 유리우스 2세(Julius Ⅱ, 재위 1503-1513)를 통렬히 풍자한 정치극이었다.
작자인 그랑고르는 당시 프랑스의 유일한 바보극의 작가로서 루이 12세에 고용되어 있었으며, 이 작품의 특징은 출연자에게 긴 귀에, 방울달린 두건을 씌우고, 황색과 녹색으로 치장된 의상을 입히며, 손에는 A를 쥐게 하여 <바보의 왕>(Prince des Sots)과 <바보의 어머니>(Mere Sotte)로 분장시켜 신A한 정치의 비평을 하게 한 것이니, 이는 사육제를 계기로 부활절제의 금욕기간인 사순절에 들어서기 전날, 즉 일요일로부터 수요일까지의 4일간은 모든 향락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랑고르는 그밖에도 "루이 성왕 일대기"등의 정치 풍자극을 남겼으며, 동시에 그는 전기 단체의 일원으로, 또 궁중연예인으로 활약했으나, 푸랑소와 1세(Francois Ⅰ,1494-1547)때에 연극이 멸시를 당하자, 1518년에 결혼하고 그후에는 은퇴생활로 들어갔다.
여기서 한가지 구별해야 할 것은 소극(Sotie)과 바보극(Farce)인데, 그 차이점으로는 별로 지적할 것이 없지만, 앞에서 보아 온 바와 같이, 소극은 일상생활을 주제로 하여 이를 상연화하거나 유머러스하게 다룸으로써 풍자했던 것이고, 바보극은 처음에는 정치풍속극으로 발전하였으나 16세기에 이르러서는 폰타레(Pontalais, 16세기초엽인) 및 쟝·스루와 같은 유명한 배우들을 가지고 있던 단체로서 이는 세상 모든 일을 무차별하게 다루었던 것이니 예를 들면 1541년 루앙에 본A를 둔 꽁나를조합(Les Connards)은 프랑스만이 아니라 전 유럽에 걸친 큰 단체로서, 그들대로의 A령과 주의를 가지고 존립했었는데, 그 A령이란 <sot> 및 <fou>란 어의자체가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 말은 곧 <바보>라는 말과 동의어로서 그들인 인간자체를 바보라 규정하고, 또 스스로 바보임을 자처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일상생활에서는 이 바보인 자신은 은폐되고, 또 은폐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그들 조합원만은 사회가 그렇게 인정해 주도록 바라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조합원 자신들도 <바보>이면서, 같은 <바보>인 왕이나, 또 다른 <바보>들의 지배를 받는 것이 우습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바?gt;로 자처하여. 대중의 앞에 나설 때는 규정된 <바보>의 의상을 걸쳤으며,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모든 정치적 사회적인 불합리성들을 조소하고 야유하며 비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모든 광적인 동작과 언행은 그들이 <바보>였으므로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았으니, 그들<바보>의 모든 행위는 그들이 <바보>라는 이유만으로도 용서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것이 곧 그 조합원들의 주의이며 A령이어서, 그들은 어떠한 정치적, 사회적인 비판도 아무런 제한 없이 할 수가 있다는 것이 특징이었으며 동시에 이것은 소극과의 차이점이 되기도 한 것이었다.
이러한 조직들이 특별히 발달한 곳은 폴랜드와 도이취의 여러 지방들이었다.
그중 도이취에는 14세기초에 이미 그들의 서정시인 나이드할터(Neidhard von Reuenthal)의 이름을 빌린 「나이드할터극」이라는 작품이 있었는데 이는 그 작자는 알 수 없으나, 2000행을 넘는 대작으로서 도이취의 소극중에서는 가장 긴 것이다.
그외에도 풍속제극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던 16세기 뉴른벨크의 직업시인 한스·삭스(Hans Sachs, 1494-1576)는 그 연대를 보아 중세의 작가는 아니지만, 그의 선배작가인 로센브뤼트(Hans Rosenblut) 및 포르쯔(Hans Folz)의 뒤를 이어 83세가 되도록 살면서, 아직 비속하던 당시의 도이취 희극에다 AA한 대화와 AA, AA과 풍AA를 가미하여 훌륭한 희극과 사육제극으로 발전시킴으로서 근세극문학을 위한 터전을 마련해 놓았다.
그의 연극은 단순한 오락만이 아니고 민중의 교화, 선도에 목적이 있었으니, 사육제극으로서 특히 이런 의의를 가진 「우자의 치A」(Das Narrenschneiden), 「두려운 연기(煙氣)」(Der bose Rauch), 「환상에서 온 도적」(Der Dieb von Funsing) 등의 작품외에도, 그는 64편의 사육제극과 59편의 비극, 65편의 희극과 기타의 극에 해당하는 10편의 작품 등, 모두 198편의 작품을 남겼다고 전한다.
그중 「우자의 치A」의 A만을 들면 남편이 매일 일터에서 밤늦게 돌아옴을 기회로, 아내는 절름발이이지만 평소에 은근히 마음을 먹고있는 목사를 기다리면서 남편의 질투 때문에 고민한다. 이때 난데없이 목사가 나타나자 아내는 반겨 맞아들여 고기와 빵과 술로 대접한다. 목사는 주인이 두려우면서도 이를 먹으려 하는데 문밖에서 방울 소리가 나며 한 젊은 행인이 들어온다. 그는 역A하는 서생으로서 A위를 얻기 위한 수학의 학비를 구걸하지만 아내와 목사는 마구 욕질을 하면서 문밖으로 몰아낸다.
서생은 그들을 유심히 쳐다보며 그런 무자비한 짓들을 하면 곧 천벌이 있으리라고 독백하고 물러난다. 두 사람은 다시 문을 잠그고 음식을 먹으려고 하는데 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남편이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어쩔 수가 없어 음식만을 치우고 목사는 주인이 잠자는 동안 달아나도록 짜고, 다락 위에 숨은 다음 주인을 맞는다. 마침 산에서 도끼가 꺽어져 그만 쉬려고 일찍 돌아온 주인은, 술과 고기를 남에게 주어버렸다고 하여 기분이 나쁜데, 다시 방울소리가 나며 아까의 그 서생이 나타난다. 당황한 아내는 얼른 나가 무엇이라도 주어 보내려고 하지만, 그 서생은 이에 개의하지 않고, 주인에게 하룻밤 쉬어가게 해주기를 청한다. 주인이 이를 승낙하자 그는 주인 몰래 아내에게 자기는 모른 척 할 테니 아내도 가만있으라고 일러둔다. 짐을 푼 서생에게 주인이 직업을 묻자, 그는 본업은 요술이지만, 그밖에도 의술과 점치는 법도 알며, 숨은 보물도 찾을 수 있다고 대답한다. 이에 감탄한 주인이 악마도 부릴 줄 아느냐고 묻자, 그는 안다고 대답하고, 잠시 주인과 아내를 방에서 나가게 한 다음 목사를 끌어내어 돈을 턴 다음, 비밀을 지켜 준다는 조건으로 악마의 역을 맡긴다. 목사는 서생의 명에 따라 옷을 벗고 온몸에 검정을 칠한 다음, 말가죽을 쓰고 곰처럼 기어서 술과 고기를 가지러 간다. 이때 주인부부를 다시 불러들인 서생이 악마를 부르자 목사가 술과 고기를 가지러 간다. 주인은 그에 놀라고 감탄하여 서생에게 그 값을 치른 다음 침소로 간다. 다시 서생은 떨고 있는 부인에게서도 비밀의 대가로 목사에게서처럼 많은 돈을 받은 다음 차려진 음식을 먹는다. 그 다음에 서생이 에피로그를 A하고 교훈을 말한데서 극은 끝난다.
이 작품에서 보는 것처럼 삭스의 작품의 특징은 장소개념이 통일되어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사건이 하나로 집중되어 연극으로서 무리가 없다는 것이니, 이는 그때까지의 어떠한 중세연극에서도 보지 못한 수법이다.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서는 종교개혁의 초기에 나온 「위텐베르그의 기러기」(Die Wittenbergisch Nachtigall, 1523)와, 4편으로 된 「대화」(Dialog 1524)는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를 찬양하고, 신교 A에 기여한 것으로서, 문학적으로도 우수한 작품들이었다.
중세 세속극의 또 한가지 모습인 교훈극도 한스·삭스의 작품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15세기 초에서 16세기 중엽까지의 프랑스의 법A극단(바소슈)이나, 영국에 있어서도 교화를 주목적으로 한 교훈극(도덕극이라고도 한다)이 성황을 이루고 있었으니, 프랑스에서는 「현과 불현」(Bien advise et Mal advise), 「주A의 죄」(La Condamnation de Banquet)등 약 60편의 작품이 남아있고, 영국에는 「만인」(Everyman)이란 hcleo의 걸작이 전하고 있다.
「만인」의 내용도 신이 <사>를 시켜 인간을 소환하자, 인간은 <우정>,<혈연>과 <부>등에게 동행할 것을 청하지만 거절당하고, 오직<선행>만이 응낙하여 누이 <설득>에게 의뢰하여 <만인>은 마지막으로 <고A> 앞으로 데리고 간다. 거기서 참회를 한 <만인>은 마지막으로 <A>의 앞에 나선다. 이때 또 <선행>의 권유를 받고 길동무가 되겠다고 약속한 <미>와 <힘>, <도리>와 <오관>이 나타나지만 결국은 그들도 도망해 버리고, 마침내 <만인>은 <선행>만을 AA자로 동행하고 신의 앞에 나타나 생전의 잘못을 용서받는다는 내용으로서, 이는 죄로 고민하는 인간의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현과 불현」은 <현>, <이성>에 인도되어 <신앙>, <AA>, <정A>, <AA> 등을 찾아보고 <영광>을 얻어 <신A>에 이르지만, <불현>은 <AA>와 <불신심>에 인도되어 <방탕>,<A습>에게서 한 짐 짐을 지고, <절망>을 지나 <화극>에 끌려가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이야기이다.
마지막으로 「주A의 죄」는 3650행의 대장편으로서, <대식>, <오락>,<축배>,<A회> 등 무려 36명이나 되는 주인공이 등장하여 종교의 대논문과도 같은 인상을 주지만, 이는 금욕과 대주, 대식을 경계한 작품이다.
여기서 본 바와 같이 당시의 종교극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그 이름 자체가 그들의 성격을 뜻하는, 일종의 성격극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주제나 형식이 모두 일정하고 내용이 단순한 것은 결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 품위로 보아 다른 희극들보다는 상격이고, 또 인기에 있어서도 결코 그에 못지 않았던 것이나, 후세에 끼친 연극적인 가치에 있어서는 기지가 있고, 발랄했던 희극에 따르지 못한다 할 것이다.
그러나 전항의 성사극의 대장편과 함께 이들 소극, 바보극, 교훈극 등의 세속극들은 어딘가 피상적이긴 하면서도 인간성을 분석하며, 다시 AA와 조소로서 거의 함께 르네상스의 서광을 맞았던 것이다.
장한기 저, 演劇史, 신아출판사, 1975